
몇년 전 아이가 낮잠을 자는 짧은 시간, 설거지를 하다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봤습니다. 머리는 며칠째 감지 않아 기름지고, 옷은 아이 이유식이 묻어 얼룩졌더군요. '나는 지금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엄마가 되기 전, 저는 회사에서 제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 엄마'로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계신가요?
🔶육아 우울증, 개인의 문제일까 환경의 문제일까..
'산후우울증(postpartum depression)'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여기서 산후우울증이란 출산 후 호르몬 변화와 환경 스트레스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정신건강 문제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국내 산모의 약 10~15%가 산후우울증을 겪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보건복지부](https://www.mohw.go.kr)).
저는 결혼 전 7년간 직장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자연임신으로 가진 첫 아이를 12주차에 유산하면서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게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건강을 되찾기 위해 과감히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고, 감사하게도 첫째를 낳고 7개월 만에 둘째까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저는 '경력단절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경력단절이란 결혼, 출산, 육아 등의 이유로 일을 그만두고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2023년 기준 국내 경력단절여성은 약 150만 명에 달합니다([출처: 통계청](https://kostat.go.kr)).
제 경험상 우울감이 찾아온 건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대화 상대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스러웠지만 어리다 보니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했고, 하루 종일 아이들과만 있다 보니 제 안에 '나'라는 존재가 점점 희미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부에서는 '엄마가 되면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희생만으로는 건강한 육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엄마도 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무너지면 결국 아이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 자존감 회복이 육아 스트레스 해소의 열쇠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효능감이란 자신이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낮아지면 우울감과 무기력증이 찾아옵니다.
저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는 시간을 활용해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파트타임으로 시작했는데,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고 제가 한 일에 대해 피드백을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나도 뭔가 할 수 있구나',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자부심이 생기면서 자존감이 올라갔습니다.
➡️➡️ 실제로 일을 시작한 뒤 달라진 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이와의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함께 있을 때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소득이 생기니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 육아 외의 성취 경험이 생기면서 아이에게 화내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물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워킹맘이라는 정체성은 두 가지 역할 사이에서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아플 때 회사를 빠져야 하는 상황, 야근이 있을 때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상황 등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런 선택이 필요했습니다. 건강한 엄마가 건강한 육아를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 육아 스트레스는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많은 육아서나 전문가들은 육아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으로 '나만의 시간 갖기', '완벽주의 내려놓기' 같은 조언을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 경험을 돌이켜보니 육아 스트레스는 단일 원인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더군요.
심리학에서는 이를 '다요인 모델(multifactorial model)'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의미입니다. 저의 경우 경력단절로 인한 정체성 상실, 대화 상대 부재로 인한 고립감, 경제적 의존으로 인한 자존감 저하가 동시에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 해결한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여러 영역을 함께 돌봤습니다.
1. 정체성 회복: 일을 통해 '○○엄마'가 아닌 '제 이름'으로 불리는 시간 확보
2. 관계 재설정: 배우자와 육아 분담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하고 역할 조정
3. 경제적 자립: 작은 소득이라도 제 돈을 버는 경험을 통한 자존감 향상
4. 신체 건강: 주 2회 30분씩 운동하며 몸 상태 관리
일각에서는 '아이가 어릴 때 엄마가 옆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엄마가 무너진 상태로 억지로 옆에 있는 것보다, 엄마가 건강한 상태로 짧은 시간이라도 집중해서 아이와 함께하는 게 더 낫다고 봅니다. 실제로 일을 시작한 뒤 아이들과 보내는 저녁 시간이 훨씬 더 따뜻하고 여유로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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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혹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결코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육아는 원래 한 사람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입니다. 저는 우울증과 육아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자부심,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존재감, 나를 돌보는 시간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건강한 육아가 가능하다는 것을요.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건강한 나로 있으려고 노력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부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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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blog.naver.com/boomily-official/222875383174